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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과학 이야기

서양은 빛을 재고, 조선은 피를 흘렸다: 빛의 속도를 쫓은 350년과 조선 왕조 잔혹사

현대인들은 누구나 빛의 속도가 유한하며, 진공 상태에서 대략 '초속 30만 km'로 달린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 엄청난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수치화하기까지는 무려 350년이라는 길고 험난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은 1638년 갈릴레오의 첫 측정 시도부터 1983년 현대 과학의 최종 정의가 내려지기까지, 서양의 천재 과학자들이 빛의 속도를 쫓던 그 찬란한 순간에, 과연 우리나라 조선 반도에서는 어떤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서양 과학사와 한국의 역사 연대표를 교차해서 흥미롭게 비교해 보겠습니다.

연도 (Time) 🔭 서양: 빛의 속도를 향한 과학 혁명 ⚔️ 한국: 격동의 조선 왕조 잔혹사
1638년 [갈릴레오 갈릴레이]산봉우리 램프 실험 (최초 측정 시도 실패) [인조 16년]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1637년) 직후
1676년 [올레 뢰머]목성 위성 관측, 빛의 속도 유한함 최초 증명 [숙종 2년]서인 vs 남인, 피비린내 나는 환국 정치 시작
1728년 [제임스 브래들리]광행차 현상 이용, 정교한 속도 수치 계산 [영조 4년]조선 왕조를 뒤흔든 거대한 내전 '이인좌의 난'
1849년1862년 [피조 & 푸코]톱니바퀴와 회전거울 도입, 지상 측정 성공 [철종 시대]안동 김씨 세도정치 절정, 임술농민봉기 (1862)
1879년~1935년 [앨버트 마이컬슨]간섭계 실험, 빛의 속도 측정 극도의 정밀화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고종 개항, 망국의 아픔과 독립운동 투쟁
1983년 [국제도량형총회]초속 299,792,458m 확정 (미터 기준 재정의) [대한민국 현대사]눈부신 경제 성장, 프로야구 출범, 컬러 TV 시대

1. 1638년: 갈릴레오의 실패와 인조의 눈물 (병자호란)

인류 역사상 빛의 속도를 처음으로 '직접' 재보려 했던 과학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입니다. 1638년, 그는 멀리 떨어진 두 산봉우리에 조수와 함께 서서 램프 덮개를 열고 닫으며 빛이 도달하는 시간을 재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빛은 인간의 반사 신경으로 측정하기엔 너무나 빨랐고, 결국 이 실험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서양에서 이런 기발한 과학 실험이 시도되던 1638년, 우리나라는 조선 16대 왕 인조 시대였습니다. 바로 1년 전인 1637년, 혹한의 추위 속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절을 했던 뼈아픈 '삼전도의 굴욕(병자호란)'을 겪고, 온 나라가 전쟁의 깊은 상흔과 슬픔에 빠져 있던 치열하고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2. 1676년~1728년: 뢰머와 브래들리, 그리고 숙종과 영조의 격동

지상에서의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서양의 과학자들은 시선을 광활한 우주로 돌립니다.

  • 1676년 (덴마크 뢰머): 천문학자 올레 뢰머(Ole Rømer)가 목성의 위성인 '이오'가 목성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 주기를 관측하여, 빛의 속도가 무한하지 않고 유한함을 최초로 증명해 냅니다.
  • 1728년 (영국 브래들리):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할 때 빛의 속도와 지구의 이동 속도 때문에 별의 위치가 미세하게 달라져 보이는 '광행차(Stellar aberration)' 현상을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정교한 수치로 계산해 냅니다.

이 빛나는 과학 혁명의 시기, 조선은 어땠을까요? 1676년은 숙종 2년으로 서인과 남인이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환국 정치)을 시작하던 무렵이었고, 브래들리가 빛의 속도를 계산해 낸 1728년은 영조 4년으로, 조선 왕조를 뿌리째 뒤흔든 거대한 내전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던 격동의 해였습니다.

3. 1849년~1862년: 거울과 톱니바퀴, 그리고 조선의 세도정치

19세기에 접어들며 광학과 기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빛의 속도 측정은 다시 우주에서 지상 실험실로 내려오게 됩니다.

  • 1849년 (프랑스 피조): 아르망 피조(Armand Fizeau)는 빠르게 회전하는 톱니바퀴 틈 사이로 빛을 통과시키고 반사되어 돌아오는 원리를 이용하여 지상 최초로 빛의 속도를 측정해 냈습니다.
  • 1862년 (프랑스 푸코): 레옹 푸코(Léon Foucault)는 톱니바퀴 대신 고속 '회전 거울'을 도입해 오차를 획기적으로 줄여 현대의 수치에 근접하게 다가갔습니다.

유럽에서 물리학 혁명이 한창이던 이 시기, 조선은 안타깝게도 철종 시대였습니다. 극심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고, 푸코가 회전 거울 실험에 성공한 1862년에는 결국 폭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난 '임술농민봉기(진주 민란)'가 터지며 나라의 근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4. 1879년~1935년: 마이컬슨의 집념, 그리고 망국의 근현대사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Michelson)은 1879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반세기에 걸쳐 빛의 속도 측정 장치(간섭계)를 극한으로 정밀하게 다듬어, 현대의 값에 거의 완벽하게 근접한 결과를 냈습니다.

마이컬슨이 평생을 바쳐 연구실에서 빛의 속도에 집착하던 이 반세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시기였습니다. 고종이 개항을 맞이하던 시기를 거쳐 위태로운 대한제국이 세워졌고, 이내 일제강점기라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피 흘리며 투쟁하던 뼈아픈 시기였습니다.

5. 1983년 마침내 확정된 299,792,458 m/s

미침내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인류는 빛의 속도를 더 이상 측정하지 않고, 진공에서 빛이 1초 동안 이동하는 거리를 정확히 '299,792,458m'로 최종 확정(정의)하면서 350년에 걸친 빛을 향한 대장정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흑백 TV가 컬러 TV로 바뀌던 역동적이고 희망찬 현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서양의 과학자들이 빛의 속도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도전하던 350년 동안, 우리나라는 전쟁과 당쟁, 외세의 침략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견뎌내고 마침내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대 과학 상식에 우리 역사의 처절한 발자취를 겹쳐보니, 시간과 역사라는 개념이 새삼 더 무겁고 깊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FAQ) - 더 알아보기]

Q1. 지금은 왜 빛의 속도를 더 이상 측정하지 않고 '확정'해버린 건가요?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빛의 속도를 재는 것보다,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다른 단위를 정의하는 것이 훨씬 정확해졌기 때문입니다. 1983년 이전에는 1미터(m)의 기준을 '미터원기'라는 금속 막대로 정했는데, 이 막대가 미세하게 변형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주 어디에서나 절대 변하지 않는 '빛의 속도'를 상수로 고정해버리고, "1미터는 빛이 진공에서 1/299,792,458초 동안 뻗어나간 거리"라고 길이의 기준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재정의한 것입니다.

 

Q2. 갈릴레오 시대에는 빛의 속도가 무한하다고 생각했나요?

네, 갈릴레오 이전의 데카르트나 케플러 같은 위대한 학자들조차 "빛은 쏘는 즉시 목적지에 도달하는 무한한 속도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이에 의문을 품고 최초로 실험을 통해 측정하려 했던 선구자였습니다. 비록 인간의 한계로 수치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빛의 속도는 무한하지 않으며, 매우 빠를 뿐이다"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후대 과학자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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